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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독립지사 안내판, 이래도 되나

이석용 의병장과 '임자동밀맹단'으로 활동했던 곡성 비밀결사대원들

오문수 | 입력 : 2021/05/12 [15:41]

▲ ▲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당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독립지사 조우식의사'라고 쓰인 안내간판으로 훼손되어 읽을 수 없다. 맨 위에 씌어진 '한국독립운동 사적지'란 글이 부끄럽다 ⓒ 오문수     ©오문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의인들에 대한 존재를 몰라 글을 안 쓰고 있으면 어떡해요."

 

가까이 지내는 최성미 전 임실문화원장의 말이다. 그는 41년의 공직생활을 마친 후 12년간 임실문화원장직을 역임하다 올 3월 10일에 퇴임한 후 임실향토문화연구소를 설립해 향토문화자료를 수집 편찬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임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지표가 있다. 임실문화원장에 재직하는 동안 발간한 임실 역사 문화자료집은 67권이나 된다.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가 고향인 내가 내 고장 출신 의인들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 것도 최성미씨에게서 <임실항일운동사>를 기증받으면서다.

 

최씨의 얘기를 듣고 부끄러웠다.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국내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목적지에 대한 사전정보를 검색하고 돌아와 또다시 검색 후 글을 쓰곤 했는데 정작 내가 태어난 고향에 훌륭한 분들이 계셨다는 걸 몰랐었다니!

 

몇해 전 일이다. 고조선역사문화유적 답사단원들과 함께 임실문화원을 방문했을 때 최성미 원장이 내게 대뜸 질문을 했다.

      

"고향이 곡성 오곡이라는 데 혹시 독립유공자 유인수를 아세요? 광주에 살고 있다는 유인수 후손이 임실문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유인수? 전혀 모르는 분이고 내 고장 출신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자 최성미 원장이 <임실항일운동사> 229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곡성 출신 명단을 보여줬다.

 

깜짝 놀라 명단 속에 거론된 다섯 분의 글을 읽으니 전부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 분들이다. 책을 받아들고 고향에 돌아와 명단에 거론된 분들의 행적을 따라갔다. 그제서야 내 어릴 적 시절이 생각났다.

 

4대문이 있었던 고향마을... 유림 활동이 활발하던 곳

 

곡성읍에서 구례 쪽으로 1.8㎞쯤 가면 고향인 오지리가 있다. 곡성기차마을역에서 1㎞쯤 떨어져 있다. 마을 중심부에는 지방도 840호선이 지나가 위 아랫동네가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6개(동동, 남동, 전동, 후동, 내동, 상동) 마을이 한 곳에 모여 있어 굉장히 큰 동네라는 의미의 대리(大里)라 불렸다. 현재는 내동을 폐지하고 당산, 신동, 창동을 추가해 8개 행정구로 구분한다.

   

▲     ©오문수

▲ 필자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있는 '도대문터' 기념비석. 한양 4대문을 본따 4대문이 있었던 마을 중심부에 있었던 목조 기와대문으로 4대문의 통제기능을 담당했다. 관리자를 두어 야간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고 전란, 비상사태 등을 신속히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 확장시 철거되고 기념비만 남았다. ⓒ 오문수

 

▲     ©오문수

▲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당산 마을 입구에는 '예절의향의 오곡'이란 기념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끝 전봇대 아래에 하얀 입간판이 '항일독립지사 조우식의사'란 글이 적힌 안내판이다. 훼손되어 글을 읽어볼 수 없어 보는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 오문수

 

   

예로부터 큰마을 '대리(大里)'라 불렸던 마을은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노인들은 '옷갓댁' '옷갓양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를 닮았다는 데서 연유됐다. 한편으로는 '의관만 번듯하게 차려입은 양반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내 고향집이 있는 동동을 안내하는 표지석에는 임진왜란 시절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 명령을 받아 전라좌수영으로 향하던 이순신 장군이 동문으로 들어와 군인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내 고향 집 앞을 스쳐 지나가며 군인들을 모은 셈이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 가려면 하얀 도포 자락을 날리며 갓 쓴 노인들이 모인 서당 앞으로 지나다녀야 했다. 당시 동네 청장년이나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하며 존경의 예를 표시했었다. <임실항일운동사>를 읽고 나서야 동네 중장년층들이 동네 어르신들을 깍듯이 모셨던 연유를 알 수 있었다. 후배들이 존경할 어르신들이 계셨던 것이다.

 

구한말 호남 의병장 이석용과 구국을 위해 활동한 '임자동밀맹단'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에는 구한말 호남 의병장 이석용과 그를 따랐던 28의사를 향사하는 사당이 있다. 소충사에는 다른 곳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비석들이 안장되어 있다.

 

28의사 비석들의 전면을 보면 의병 하나하나의 이름과 함께 하늘의 28수 별자리를 각각 하나씩 배당하여 그려놓고 있다. 말하자면 의병들의 숭고한 기개와 희생을 천문의 질서 속에 안치하여 별들의 영원함처럼 뜻이 영원히 기려지기를 기원한 기념비 성격이 부여되어있다.

 

이석용은 고종 15년(1878년) 임실군 성수면 삼봉촌에서 전주이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유가 경전과 역사서 및 제자백가서를 공부하는 등 전통 유학자의 길을 걷다가 1905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위협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1906년 미국공사에게 부당함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

 

또한 당시 정읍 태인에 와 있던 면암 최익현을 찾아가 구국지책을 논하는 등 비분강개하던 중 일제가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폭압을 보고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에서 의병창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     ©최성미

▲ 구한말 호남 의병장이었던 이석용 의병장 모습으로 사형당하기 직전 일경이 촬영했다고 한다. ⓒ 최성미

▲ ▲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일대에 건립된 소충사 모습. 이석용의병장과 의병들이 항일독립운동에 나서 일본경찰과 싸우는 모습이다. ⓒ 오문수     

  

500여 명에 이르는 의병들과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에 추대된 그는 1909년까지 3년간 전라북도의 진안, 용담, 남원, 영광, 임실, 전주, 순창, 태인 등지에서 일제 군대를 상대로 숱한 전투를 벌이어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 10월 근대적인 무기와 조직적인 군사작전을 펼치는 일제가 1만에 이르는 호남의병 토벌대를 편성하여 토벌작전에 나서면서 의병들의 희생이 잇따르자 아까운 희생을 막고자 무력투쟁 노선을 포기하고 1909년 3월 휘하 의병들을 해산했다.

 

이후 1911년 3월 일본에 잠입하여 일왕 암살을 계획하였고 1912년 겨울 다시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任子冬密盟團)'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펼치고자 했으나 1913년 10월 망명자금을 부탁한 친구의 밀고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36세가 되던 1914년 4월 4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임자동밀맹단(任子冬密盟團)'에 가입한 비밀결사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무기와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보급하여 병력을 보충해 주고 의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 다음은 이 때 결성된 지역별 비밀결사대 명단이다.

 

이석용 단장아래, 구례 - 정찬석, 하동 - 최제학, 이규진, 전주 – 최병심, 임실 – 김병주, 최창열, 진안 – 정진희, 최자운, 이경하, 곡성 – 안자정, 안영오, 유인수, 조영선, 조우식, 남원 – 김경호, 조성민, 김인식, 김학수, 허간, 허주, 허업의 22인이 있다.

 

향리에 서당을 열어 후학 교육에 전념했던 항일독립운동가들

 

안자정의 제종형인 안영오는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친형제처럼 지냈으며 기우만, 곽종석 두 스승에게 같이 배웠다. 덕행이 있어 향리의 사표가 되었고 일경의 감시와 서책 몰수, 가택수색 등 심한 괴로움을 당했다.

 

특히 안자정은 재주가 뛰어나 유학자로서 고명하고 제자가 1천여 명에 달했으며 스승의 파리장서에 힘이 된 바 컸다. 안자정은 '임자동밀맹단'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3년부터는 향리에 자신이 세운 서당인 '완계정사(浣溪精舍)'에서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137인 중 한 분이다.

  

 

▲ 안자정 선생의 초상화로 1919년 파리만국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낸 137인 중 한 분이다. 일제의 단발령,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 을 결성해 활동하고 이석용 의병장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돼 임실형무소에서 130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다. ⓒ 오문수

 

 

▲ ▲ 안자정 선생이 1901년에 세운 '완계정사' 모습으로 후학을 기르는 서당이었다. 전통 서당의 양식을 따라 중앙에는 서재를 두고 정면은 선생의 공부방으로, 동쪽과 서쪽은 학동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됐다. 현 모습의 '완계정사'는 2003년에 건립되었다. ⓒ 오문수    

 

일제의 단발령과 창씨개명 등 중요정책에 반대하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1941년 이석용 의병장 추모비를 세우려다 일경에 검거돼 임실형무소에서 130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2003년)하였다.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태어난 조우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사에서 전주 의병대 및 남원의병대와 함께 적과 접전하였다. 음력 4월 13일 태인에서 의진을 구성한 면암 최익현 의진이 정읍, 순창,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되돌아올 때 면암의 의진에 합류했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황제의 칙지와 고시문을 전해왔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는 접전할 수 없다고 하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했으나 진위대는 의진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어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면암의 곁에는 조우식, 최제학 등을 비롯한 12명의 문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격해 들어온 관군에 의해 모두 체포된 이들은 경성으로 압송되어 신문(訊問)을 받았으며 조우식은 징역 8월에 태(笞) 100도의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 ▲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조영선과 함께 세운 '오강사'를 1921년 훼철하려 들자 총독과 곡성경찰서장에게 항의문을 보내 1922년에 복설했지만 1934년에 일경이 또 다시 훼철하자 오강사 곁 노거수에 목을 매 자결했다. ⓒ 오문수

▲ ▲ 조우식이 조영선과 힘을 합쳐 세운 '오강사' 모습. 1921년 일경으로부터 최익현의 영정이 압수당하고 두번에 걸쳐 '오강사'가 훼철당하자 조우식은 오강사 옆 노거수에 목매 자결했다. ⓒ 오문수

 

     

의병 거병 후 면암과 함께 왜병에 피체되어 대마도로 끌려간 조우식은 면암이 순국하자 그와 함께 피체되었다가 돌아온 조영선과 힘을 합쳐 유림들과 협력해 '오강사'를 세웠다. '오강사'는 서당의 일종으로 교육기관이다.

 

1921년 일본경찰에 의해 면암의 영정이 압수되고 사우가 훼철 당하게 되자 곡성 유림들이 총독과 곡성경찰서장에게 항의문을 보내어 1922년에 다시 사우의 복설을 보게 되었다.  

     

그 후 1937년에 또다시 훼철 당하자, 조우식이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오강사 곁 노거수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오강사는 1946년에 이르러 중건되었으며 1954년에 조우식을 추배하였다. 1956년에는 조영선을 추배하였으며, 1969년에 중수하였다.

     

1993년에는 석연 정대현을 추배하였다. 사우내에는 면암과 성암의 영정 및 4위의 위패가 있다. 조우식의 호는 성암(省菴)이다. 조선 말기 의병이었던 조우식은 14권 5책의 시문집인 <성암집>을 남겼다. 그의 시에는 항일의사들이었던 조병세, 조만식, 민영환, 안중근, 임병찬, 이준 등을 기리는 위국충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 ▲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유인수 의적비.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의 곡성지역 단원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제공했다 ⓒ 오문수

 

 

1860년 3월 17일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서 태어난 유인수는 조국이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하자 1908년부터 이석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의병의 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1908년 9월에 15냥, 1909년 10월에 3냥, 1912년 4월에 20냥 등 총 38냥의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2001년)을 추서하였다.

 

며칠 전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이들을 기리는 흔적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유인수 의적비는 멋진 모습의 비석으로 세워져 있었고 안자정이 후학을 길러냈던 '완계정사'는 고향마을을 굽어보는 훌륭한 사당으로 변모해 있었다.

 

오지리 당산 마을 입구에는 '예절 의향의 오곡(禮節義鄕 의 梧谷)'이란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돌 기념비에서 5미터쯤 떨어진 구석에는 한국독립운동 사적지란 표시와 함께 '항일독립지사 조우식 의사'란 안내 간판이 있었다. 하지만 낡아빠진 안내판은 훼손되어 읽을 수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젊은이들이 고향을 등지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마을. 학생이 많을 때는 2부제 수업까지 했던 오곡초등학교는 폐교되어 휑한 모습이다. 학식이 높고 기개 있는 어른들이 돌아가신 고향마을에 들를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떤 연유일까?

 

국권 회복을 위해 애쓰고 불의에 항거하며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던 선열의 초라한 안내판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은 지키려고 노력할 때라야 지켜진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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