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 오마이뉴스 오문수 기자가 발품을 팔아 걷는 길이다. 어느덧 하동과 광양에 다다랐다. 기자가 눈으로 마음으로 손으로 담아내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많이 읽혀지길 바란다. 편집자 주
중섬 고수부지 천변에 만개한 유채꽃밭을 찾은 관광객들이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도로가 좁아 인근 주민들은 불편해한다고 한다.
▲ ▲ 중섬 고수부지 천변에 만개한 유채꽃밭을 찾은 관광객들이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도로가 좁아 인근 주민들은 불편해한다고 한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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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하류 하동에서 출발한 내 발길이 드디어 종점인 광양 배알도에 도착했다.
한반도 남단에 속한 하동군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전라남도 광양시와 구례군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진주시와 사천시, 남쪽으로는 남해 바다를 경계로 남해군과 접하고 있어 2개도 8개 시·군과 접하고 있다.
하동 소재지 인근 섬진강변을 따라 걸으며 강물을 보니 섬진강 상류인 임실과 순창에서 보았던 섬진강물과는 완연히 다르다.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기수역'이어서 인지 강물이 탁하다.
달라진 건 강물만이 아니다. 숭어로 보이는 커다란 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도 보인다. 하동의 국밥집에서 만난 한 주민은 "가뭄이 들어 섬진강물이 줄어들면 돔새끼가 잡히기도 하고 농어도 올라와요"라고 말했다.
강 주변에는 바닷가 어촌처럼 배들이 줄줄이 정박해 있고 어촌계 팻말까지 보인다. 흡사 바닷가 항구에 온 느낌까지 들었다. 배 몇 척이 파도를 일으키며 섬진강 중앙에서 맴도는 모습이 보여 물어보니 2년 전 섬진강 대홍수 때 떠내려온 부유물을 치우는 작업 중이란다.
하동은 재첩국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재첩을 잡을 시기가 아니지만 부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재첩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청소 작업을 하고 있단다. 재첩마을 인근에서 참게를 잡는 한 주민과 대화를 나눴다.
"2년 전 섬진강 대홍수로 강변이 물에 잠기고 나서 섬진강에 사는 고기들이 거의 몰살당했어요. 작년에는 참게가 안 잡혔는데 올해는 몇 마리라도 잡히네요.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낫겠지요. 섬진강변에서 76년 동안 살면서 이런 일을 겪기는 처음이에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입니다. 대홍수 이후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능교?"
섬진강에서 참게를 잡은 한 주민이 섬진강 대홍수는 인재였다며 불만을 표했다.
▲ 섬진강에서 참게를 잡은 한 주민이 섬진강 대홍수는 인재였다며 불만을 표했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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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첩특화마을 인근 벽화에 붙여진 재첩수확모습. 하동은 재첩으로 유명한 곳이다.
▲ 재첩특화마을 인근 벽화에 붙여진 재첩수확모습. 하동은 재첩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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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하류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조개를 채취하고 있었다. 하동에서 광양을 잇는 섬진강변 마지막 다리인 섬진대교를 건너면 태인동이 나오고 그곳에는 섬진강 자전거길 인증센터가 있다.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선에 선정된 배알도 섬정원
인증센터 앞에는 임실군 강진에 있는 섬진강 종주 자전거길 출발점에서 이곳까지 달려와 인증받으려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섬진강변을 따라 147㎞를 달려 종점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나도 그곳에서 출발해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 서울고등학교 동창생이라는 네 분을 만났다.
일행은 한 달에 한 번씩 부정기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국토 종주에 나선다고 한다. "전주에서 출발해 2박 3일에 거쳐 태인동까지 왔다"는 이들의 리더인 홍성필씨와 자전거가 주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동차와 인도밖에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자전거를 타면서 새로운 길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아하! 나에게도 새로운 길이 있겠구나 생각했죠. 자전거 여행을 통해 겸손함을 배우고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태인동과 망덕포구 사이에는 배알도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다. 태인동 1번지인 배알도는 진월면 망덕리 외망마을 산정에 있다는 '천자'에게 배알하는 형국이라 하여 배알도라 하였다. '천자'에는 명당이 있다고 전해진다.
배알도는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선'에 선정된 자전거길 종주가 완성되는 곳이자 시작점이기도 하다. 배알도는 해수욕장으로 조성되었다가 폐장되었고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과 캠핑장으로 탈바꿈했다.
윤동주 유고를 보존해 햇빛을 보게 한 정병욱 가옥
이들과 인터뷰를 마치고 배알도를 거쳐 정병욱 가옥으로 갔다. 정병욱 가옥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1917~1945)는 1941년에 <하늘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온전히 보존해 윤동주 시가 빛을 보도록 한 정병욱 가옥 모습.ⓒ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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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그의 친우인 정병욱(1922~1982)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겼고 정병욱 교수 모친이 마루 밑에 숨겨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집은 정병욱의 부친이 건립한 건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한 건축물이다.
지난 일요일 내 일정은 하동버스터미널에 차를 주차하고 배알도까지 돌아본 후 하동으로 되돌아오는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해양수산교육원 해양환경감시단 김호 센터장 모습으로 섬진강유역의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의 후손이다.
▲ 해양수산교육원 해양환경감시단 김호 센터장 모습으로 섬진강유역의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의 후손이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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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몰라 묻다가 운좋게도 해양수산교육원 해양환경감시단 김호 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섬진강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태인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의 후손이라는 그와 함께 유채꽃이 만발한 중섬 고수부지를 돌아보았다.
임진·정유의 두 왜란 중 긴박한 전황을 전했을 묘도 봉화대(봉수대)
광양에서 여수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는 생긴 모습이 고양이를 닮아 '묘도'라 부르는 섬이 있다. 묘도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면 봉화대가 있다. 묘도 봉화대에서 서쪽을 보면 여수국가산단이, 동쪽에는 광양제철소가 보인다.
봉화대는 옛날에 사용되었던 비상통신수단이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위급상황을 알려 통신망을 따라 남산 목멱산까지 전송돼 임금에게까지 보고되는 통신수단이다.
광양과 여수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묘도 봉화대 모습.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광양만에서 벌어졌던 조명 연합군과 왜수군의 격전현장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인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장군의 모습도 지켜보았던 역사적인 봉화대이다.
▲ 광양과 여수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묘도 봉화대 모습.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광양만에서 벌어졌던 조명 연합군과 왜수군의 격전현장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인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장군의 모습도 지켜보았던 역사적인 봉화대이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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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와 광양사이에 난 이순신대교 모습. 다리 아래 오른쪽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주둔했다고 하여 지금도 '도독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반대쪽에는 이순신장군을 위시한 조선수군이 주둔했던 선장개가 있다.
▲ 묘도와 광양사이에 난 이순신대교 모습. 다리 아래 오른쪽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주둔했다고 하여 지금도 '도독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반대쪽에는 이순신장군을 위시한 조선수군이 주둔했던 선장개가 있다.ⓒ 오문수 ©金泰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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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는 정유재란 막바지인 1598년(선조 31) 9월 하순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약 2개월간에 걸친 광양만전투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의 조·명연합군이 진을 쳤던 곳이다.
진린도독이 주둔했던 곳은 지금도 도독마을로 불리고 있으며 서쪽 바닷가에는 조선수군이 함선을 감췄던 선장개가 있다. 묘도 봉화대는 광양만 중심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을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 현장이다.